오랜만에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해볼까.
도스 시절 한글 입출력은 상당히 까다로운 과제였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잡지를 통해 엄청난 분들이 한글 코드에 대한 이야기를 기술적으로 많이 풀던 시절이었다. 여튼, 나는 주변분들의 요청을 받고 가끔 프로그램을 만들어 용돈을 벌곤 했는데, 대부분 한글로 메시지를 표시해야 했다. 그럴려면 한메나 도깨비같은 램상주프로그램을 실행하면 한글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야기였나? 어떤 프로그램이 먼저였을까? 별도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하지 않아도 화면에 한글이 표시되었다. 한글을 표시하려면 글꼴 처리, 비트맵 연산, 메모리 관리, 입력까지 받으려면 오토마타까지 공부해야 하는데.. 그 공부가 재미있겠냐고! (물론 지금은 그런 주제의 책을 읽는게 재미있지만, 20대 청춘에게는 훨씬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나는 링크로 이용할 수 있는 한글 라이브러리를 쓰는 것이었다.
요즘은 보기가 드물어졌지만, 예전에는 훨씬 다양한 오픈소스 또는 쉐어웨어들이 있었다. 대학생들이 만든 것들도 많았는데, 한글 라이브러리의 경우 대표적인 것이 터보C정복의 저자 임인건님이 만들었던 <한라 프로>, 경북대 김현호님(정확하지 않음)이 만든 <한> 라이브러리, 카이스트 한우진님이 만든 <허르미> 라이브러리가 있었다. 그 외에도 '산'이라는 에디터를 만든 김규현님이 코드를 많이 공개했던 터라 이래저래 코드를 살펴봤던 것 같다.
이제는 어렴풋한 기억이 되어버렸지만, <한라 프로>는 엄청난 기능(과 속도)에 당시 SVGA까지 지원하는 유려한 라이브러리로, 개인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때 기본으로 사용했다. 가남사에서 <한라 프로>라는 책도 나왔었고, 디스켓으로 라이브러리가 제공되었다. 한 라이브러리의 코드는 깔끔했다는 기억이 있고, 허르미는 객체로 잘 구분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팝업 메뉴 구현이나 커스텀 창을 구현하기 위해 허르미 코드를 많이 참고했었다.
때로는 잊고 있었던 기억이 우연찮게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올 때가 있다.
올해 초 스마일게이트에서 함께 일했던 인연으로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근황 토크를 나눈 적이 있는데, 최근 내가 참여하고 있는 EMR 개발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이사님이 자신도 대학생 시절에 한글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던 인연으로, 어떤 의사분이 연락을 해와서 EMR을 만든 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그때 앞에서 말한 이야기들이 모두 소환되었고, 이사님이 바로 허르미를 만든 한우진님이었다. :)
한이사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집에 와서 허르미 소스코드를 찾아서 보내드렸더니, 본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소스코드를 어떻게 가지고 있냐고 좋아하셨다. :)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는 이런 재미가 있다. 영문학을 전공하는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영문학도들은 세익스피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지만, IT 분야는 아직 개척자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며 농담을 나눈 적이 있다. 최근 북 펀딩을 해서 이번달에 출간될 <Programmers at work>과 <Coders at work>이라는 책이 있는데, 유명한 당대 개발자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그 당시 개발자들이 여전히 계신지 찾아보니, 원 인터뷰가 있었던 이후에도 시간이 흘렀는데, 여전히 많은 분들이 살아계신다.
인생 도처에 고수들이 많이 있고, 그 분들을 만나서 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발전해온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야가 몇이나 있을까.이 즐거운 분야에서 일하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하며 추석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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