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거대한 용광로??

어쩌다 보니 개인 블로그가 IT 관련 서적을 읽고 정리하는 블로그가 되어가고 있지만,
나란 인간은 여전히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중년이다. (친한 동생은 나에게 지적 오지랖이 넘친다고 했다.)
연말이고 해서 그동안 어떤 책들을 많이 읽었는가를 되돌아보다가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읽은 책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에 집어든 책이 경희대 사학과 강인욱 교수의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이다.
업어온지는 꽤 시간이 된 책인데, 문득 K-*가 주목받는 현재 우리의 기원은 어떻게 만들어 진 것이며, K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이 책을 펼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다시 읽을 생각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의 풍부한 고고학적 지식과 설명은 꽤나 흥미로운 관점을 많이 제공해 주고, 새로운 시선을 전달해 준다. 사실 나에게 고고학이라고 하면 인디애나 존스밖에 모르는 수준인데.. 이 책에서는 과학(신기술)과 언어, 자연환경의 변화, 주변 권력의 변화에 따른 한반도 거주민의 영향을 재미있게 소개한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대목은 134쪽이었다.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 얼바인 근처에서 8년간 거주했었는데, 얼바인은 전세계 문화가 다 섞이는 melting pot같다는 이야기를 지인들과 나누곤 했었다. 그런데 강인욱 교수는 오히려 "한반도가 마치 용광로같다고 자주 생각한다.한반도라는 지리적 환경은 변하지 않는데, 이 작은 땅에서 대륙과 바다를 톨로로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이 오간다. 그 속에서 지금의 문화를 구축했다. 한반도는 대륙 끝의 동떨어진 땅처럼 보이지만 고립되지 않고 끊임없이 교류하고 이주하며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말한다.
변화에 예민하고,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한반도.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과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낸 원동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해 보았다.
이어 "고립성을 뚫고 주변 지역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인적 교류를 한다는 것은 어쩌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모험이었고, 인류는 그 모험심 덕분에 발전해 왔다. 우리의 살아있는 역사는 우리가 끊임없이 주변 지역과 부딪히며 살아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말에서는 자원이 부족한 환경에서 우리가 이만큼 성장해온 배경에는 용기 넘치는 K-정체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또한 재미있게도 금관에 관한 이야기가 소개되었는데, 일부러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어서(편두) 금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들 뿐이라면서 선민의식을 강조했다는 말에, 최근 신라 금관을 선물받고 좋아하던 미국 대통령의 모습도 오버랩되었다.
늘 왜 광활한 대지를 호령하던 고구려가 아니라 한반도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까라는 이야기를 술자리의 주제로 올린 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결국 신라가 그럴만한 문화적 토양을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만에 과거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인문학도 과학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수용하는구나라는 (선입견을 격파해준) 깨달음을 제공해 준 책이 되었다.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에 현기증이 나는 요즘, 오히려 반대로 수천년을 관통해온 우리의 기원을 생각해 보고 싶은 분들께는 꽤 재미있는 시간을 제공해 줄 책이다. 다음은 이 책에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구절들이다.
- 세상을 바꾸는 신기술 하나가 한 나라를 먹여 살리기도 하고, 다른 나라와 갈등을 일으키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청동기라는 기술은 거대한 하나의 문명을 이룰 만큼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 고고학자들이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국가의 조건은 바로 계급이었다.
- 공동체의 구심점이 사라진 유목문화에서 모임 장소로써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 고분이었다.
- 국가가 성장하면 자동으로 고가품이 수입되거나 고급 기술이 유입되었다. 뛰어난 기술로 정교한 장신구나 도구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 내물왕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외국인이 대거 유입된 시점은 신라가 거대한 국가로 폭발적인 성장을 한 시기와도 맞물렸다.
- 흉노는 그 당시에 선진 문화, 선진국의 대명사였던 셈이다.
- 금관에는 독점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신의 선택을 받은 금관을 쓴 사람, 그들은 권력과 정당성을 거머쥐었다.
- 신라인들은 자신의 기원을 스스로 만들어나갔다. 혈연관계만으로 누구의 후예라고 판단하지 않고, 스스로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민족의 문화를 넓게 포용하면서 나라의 정체성을 새롭게 세웠다.
- 언어는 서로 교류하며 혼재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전 및 쇠퇴, 분화를 거듭한다. 언어의 본질은 인간들 사이의 교류를 반증해 주는 자료이다.
- 독립을 갈구하며 언어의 기원을 찾는 핀란드인들의 이야기는 일제강점기때 일본어를 강요받으며 한국어의 기원을 찾던 우리의 상황과 너무나 유사하다. 언어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것은 없다.
- 기원이라는 것은 핏줄이 아니다. 적응이다.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결국 후손을 더 많이 퍼뜨릴 수 있다. 그럼 그들이 기원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원은 순수하고 우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더 환경에 잘 적응했냐를 가늠하는 기준일 뿐이다.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 | 강인욱 - 교보문고
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 |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국내 대표 고고학자 강인욱 교수가 전하는 단일하고도 다채로운 ‘한민족의 기원’ 이야기살아가는 데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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